[연재]소설 - 『다시, 회기』 작가의 말

By. 박수빈

- 『다시, 회기』 3회가 올라가던 즈음 수빈 군에게 이번 작업에 관한 '비하인드' 또는 '코멘터리'를 담은 글을 한 편 부탁했다.



  처음에 쓰려던 소설은 회기동을 배경으로 하는 밝은 분위기의 성장소설이었다. 내용은 대략 이렇다. 


  회기동에 이사를 온 ‘나’가 이삿짐을 풀면서 어릴 적에 썼던 일기장을 발견한다. 자아 탐구의 측면에서 지금의 고민과 어린 시절의 고민이 크게 다르지 않다는 걸 발견한다. 여러 사건을 겪는다. 각 사건은 어린 시절의 특정 장면들과 교차된다. 마지막엔 자아에 대한 고민은 평생 해야 한다는 깨달음을 얻게 된다.


  무척이나 밝고 건전한 소설이었다. 좋은 내용이니 잘 쓸 수 있을 거라고 막연하게 생각했다. 본격적인 작업이 시작되고 알았다. 나는 그 세계의 불청객이었다. 아무리 문을 두드리고 말을 건네보아도 그쪽 세계 주민들은 나를 투명 인간 대하듯 했다. 가끔 내게 말을 건네기도 했지만 사실상 허공에 대고 말하는 수준이었고, 외국어 같아서 알아들을 수도 없었다.

  다른 세계의 문을 두드리면 다르지 않을까? 혹시나 하는 마음이 들었다. 다행히 눈에 띄는 곳이 몇 있었다. 차례대로 문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끼이익. 어딘가 음침하고 곰팡내 가득한 세계의 문이 열렸다. <다시, 회기>는 그렇게 시작됐다.


  첫 번째 세계의 주민들과 다르게 이쪽 세계 주민들은 바라보기만 해도 자신들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심지어 자기 집에 초대해서는 나의 이야기를 물어보고 귀 기울여주기도 했다. 내가 한 일이라고는 그들과 어울린 것뿐이었다. 정신을 차려보니 초고 비슷한 게 완성되어 있었다. 시기마다 쓸 수 있는 글이 정해져 있다던데 지금 내가 쓸 수 있는 글은 이거였나보다.

 

  소설을 쓰는 건 처음이다. 에세이집도 내보고 논설문이나 설명문 투의 글은 중고등학생 때부터 꾸준히 써왔지만, 소설을 이렇게 끝까지 써본 건 처음이었다. 그래서 이건 나에게 무척이나 도전적인 과제였다. 마냥 자유로운 줄만 알았던 소설 쓰기는 사실 창의성만큼이나 치밀함이나 논리성을 요구하는 작업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김영하 작가가 <살인자의 기억법> 후기에서 밝힌 것처럼 어떤 작품이든 후반부로 갈수록 자유도는 0에 수렴하게 된다. 마지막에는 이야기의 전개와 캐릭터의 특성, 주제 의식을 고려했을 때 전개될 수 있는 이야기가 하나밖에 남지 않게 된다. 마치 스테이지가 올라갈수록 난이도가 점차 높아져가는 퍼즐 게임을 하는 것 같았다. 처음에는 내키는 방법을 선택하여 자유롭게 퍼즐을 맞출 수 있었다면 마지막에는 정신을 집중해서 정해진 하나의 방법을 찾아내야 했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작품, 그중에서도 <노르웨이의 숲>에 큰 빚을 졌다. 시골 소년의 첫사랑 이야기가 <소나기>를 피해 가기 어렵고, 표현이 서툰 소녀와 눈치 없는 소년의 이야기가 <동백꽃> 향을 안 풍기기 어려운 것처럼, 죽음 곁에 있는 친구를 지켜보는 ‘나’의 이야기를 쓰는 이상 나는 <노르웨이의 숲>의 그늘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특히 공허한 상태에서 누군가의 온기를 찾게 될 때 그 누군가는 사실 아무나여도 상관없다는 이야기나, 죽음에 있어 그것이 아예 벌어지지 않았다는 표현은 성립할 수 없다는 깨달음은 내가 그의 작품을 읽지 않았더라면 이르지 못했을 수도 있는 부분이다. 배치된 맥락이나 표현방식, 작품에서 해당 내용이 차지하는 위상 모두 <노르웨이의 숲>과 달랐지만 작품에 빚을 진 것은 변함없다. 그와 그의 작품에, 그리고 내가 그의 작품을 읽을 수 있었음에 감사한다.

 

  다음에 작품을 쓰게 된다면 누군가의 그늘에서 한 발짝 정도 더 벗어나 작품을 쓰고 싶다. 그리고 조금은 더 밝은 작품을 쓰고 싶다. 대책 없이 밝은 작품이라면 가장 좋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건 논리정연한 비관보다 근거 없는 낙관이라는 생각이다. 차기작으로 생각하고 있는 작품은 다음과 같다.

 

1. 국가장학금이나 주거지원과 같은 제도적 혜택을 누리고 싶어 하는 대학생 둘이 계약 결혼을 하는 이야기

2. 남초 우파 인터넷 커뮤니티 중독자 남학생과 여초 좌파 인터넷 커뮤니티 중독자 여학생이 사랑에 빠지고 서로를 이해하게 되는 이야기

3. 제도적 혜택을 누리고 싶어 하는 대학생 둘이 계약 결혼을 했는데 알고 보니 남자 대학생은 우파 남초 인터넷 커뮤니티 중독자이고 여자 대학생은 좌파 여초 인터넷 커뮤니티 중독자인 이야기

 

  4회차 연재분에 ‘끝’이라는 글자가 따라왔다. 아무리 눈을 씻어봐도 나는 그것이 어쩐지 ‘시작’으로 읽힌다. 지금은 다양한 시도를 해가며 그저 많이 배우고 싶다. 다음 작품의, 다다음 작품의 ‘끝’도 아마 시작으로 읽힐 것이다.





#소설  #다시회기  #회기동소설

박수빈

낮잠을 좋아한다. 눈을 떴을 때 햇빛이 방안 깊숙이 들어와 있는 순간을 좋아한다.

불쑥하는 연락을 좋아한다. 한 친구가 나오는 꿈을 꿨는데 일어나보니 그 친구에게서 연락이 와있는 순간을 좋아한다.

식상한 끝인사를 좋아한다. 안녕히 가세요-에서 안녕히-라는 말을 유독 좋아한다.

자신이 무얼 좋아하는지 잊지만 않아도 인간은 꽤 행복하게 살 수 있다고 믿는다.

현재 홍릉 일대 도시재생현장지원센터의 '사회혁신커뮤니티' 공간을 관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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